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핀란드 내전 (문단 편집) === 학살과 포로수용소 === 내전기에 백군과 적군은 서로가 '[[적색테러]]'와 '[[백색테러]]'라고 불리는 테러의 가해자였다.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부터 [[핀란드인]]들의 러시아 경찰에 대한 테러는 시작됐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3월엔 러시아 경찰이 6~7명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 경찰은 27명의 핀란드인을 죽였다. 러시아 제국의 권력이 무력화된 이후부터는 1918년의 전쟁 동안 두 가지 종류의 테러가 존재했다. 군사적으로 철저히 계산된 것과 개인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복수가 그것이다. 양측 모두에서 테러를 계획하고 이를 주문했다. 입증된 것만 따져봐도 적색테러의 3분의 1, 백색테러의 대부분이 중앙에서 주도한 것이었다. 내전 시작 시기에 백군 정부와 적군 정부 모두 공식적으로는 테러에 반대했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이 테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테러의 주된 목표는 상대의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다른 효과는 상대측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충격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양쪽 모두 군대의 정예도가 떨어지다 보니 이런 공포에 강하지 않았고 테러는 이런 병사들의 사기를 와해시키는 데 아주 적절했다. 적군과 백군 모두 상대의 테러 행위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프로파간다를 사용했다. [[http://vesta.narc.fi/cgi-bin/db2www/sotasurmaetusivu/stat2|핀란드 국가기록원]] 자료를 따르면 핀란드 내전기 사망자 통계는 다음과 같다. || 사망 원인 || 적군 || 백군 || 그외 || 계 || || 작전 중 사망 || 5,199 || 3,414 || 790 || 9,403 || || 학살 또는 피살 || 7,370 || 1,424 || 926 || 9,720 || || 포로수용소 학대로 사망 || 11,652 || 4 || 1,790 || 13,446 || || 수용소 석방 이후 후유증으로 사망 || 607 || – || 6 || 613 || || 실종자 || 1,767 || 46 || 380 || 2,193 || || 그 외 || 443 || 291 || 531 || 1,265 || || 계 || '''27,038''' || '''5,179''' || '''4,423''' || '''36,640''' || 백색테러가 훨씬 더 많은 것에서 보듯 이것은 내전에서 승리한 쪽이 행하는 정치적 인종청소(폴리사이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백색테러로 죽은 적군 사망자 수는 몇 명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 백군에서 포로를 불법적으로 즉결처형하고 "자위적"으로 죽였다고 주장한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특히 적군에 가담한 여성 노동자 2,000여명은 남자 포로들보다 더욱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핀란드 우파의 보수주의자들은 여성이 바지를 입고 총을 들었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고(또는 않았고) 그들을 핀란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지워 버려야 하는 병균 같은 것으로 선전했다. 여성 적위대원들은 거의 무조건 [[강간]]당한 뒤 불법적으로 처형되었다. 이것은 남자 포로들은 분대장급 이상이 주로 처형되었지만 여자 포로들은 졸병까지 모조리 처형되었다는 사실로 방증된다. 내전 중 80,000여명의 적군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은 포로수용소에 집단으로 수용되었다. 내전으로 인해 식량사정이 악화된 상황에서 포로들에게 돌아갈 식량은 없었다. 심지어 [[스페인 독감]]까지 돌면서 11,000 여명 이상이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좌파 성향으로 내전을 겪은 세대에게 포로수용소는 끔찍한 트라우마가 되었고 이 사람들은 이후 좌파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